수은강항선생 연보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강의나라
조회 191회 작성일 24-04-26 23:29
조회 191회 작성일 24-04-26 23:29
본문
-명종22년 1567년 정묘(1세) : 5월 17일, 영광 불갑 유봉리에서 몽오(夢梧) 강극검공(姜克儉公)과 모친 영동 김씨(화순)의 5남 1녀 중 중 넷째로 태어나다.
-선조 4년 1570년 경오(4세) : 백형 해(瀣)<저어당 : 이이 율곡선생 문인>이다.
-선조 5년 1571년 신미(5세) : 전라감사 신응시가 각(脚)자로 작문 운을 주자 <각도만리심교각(脚到萬里心敎脚)>이라고 응하자 탄복 하였다.
-선조 7년 1573년 계유(7세) : 맹자 1질을 한나절에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함에 책장수가 천재라 탄복하고 책을 그냥 주자 사양하니 정자의 나무에 걸어 놓고 떠나 맹자정이라 함. 현재 불갑면소재지에 맹자정기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 근처를 맹자마을이라 칭함.
-선조 8년 1574년 갑술(8세) : 중국고서 통감감목을 하룻밤 새에 통달하여 고창군 아산면 칠암(칠암마을)고을에 강목촌(강목마을)이 생겨나고 현재 전해내려오고 있음.
-선조 9년 1575년 을해(9세) :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를 지었다.
(어릴 때 습성을 익혀두면 천성과 같이 된다는 내용)
-선조 10년 1576년(10세) :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예와 경학을 터득함.
-선조 14년 1580년 경진(14세) : 모친 김씨 상을 당하여 禮(예)를 갖춰 정성을 다하다.
-선조 15년 1581년 임오(15세) : 母親喪(모친상)을 마치고 책문(策文)으로 향시(鄕試)에 합격하다.
-선조 15년 1583년(17세) : 향시에 합격(초시)
-선조 21년 1587년 정해(21세) : 진사시 삼장(三場)에 모두 합격하다.
-선조 22년 1588년 무자(22세) :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다. 관례를 하고 참봉(參奉) 김봉(金琫)의 딸 전주김씨와 혼인하다.
-선조 25년 1591년 신묘(25세) : 백형 저어당이 신묘사화로 화를 당하다.
-선조 26년 1592년 임진(26세)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띄워 군량과 군기를 모아 의병장 제봉 고경명에게 보내다. 영광 임진 수성활동에 장문서로 참여하고 의병활동하다.
-선조 27년 1593년 계사(27세) : 광해군이 진주의 분조(分朝)에서 시행한 정시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하다.<김신국, 김홍우, 이진선 등 9 명이 뽑히다. 소금과 절인고기 등 어염을 유통하고 백미 100석을 모아 사촌동생 만은공 강낙으로 하여금 고경명, 김천일, 최경장 의병소에 보내주다.
-선조 28년 1594년 갑오(28세) : 성혼(成渾)의 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교서관(校書館)에 분관되다. 우계선생의 문호가 쓸쓸하니 멀리 찾아가 뵈다. 겨울, 기주관(記注官)으로 경연에 입시하다.
-선조 29년 1595년 을미(29세) : 문한(文翰)을 잘 처리하여 선조의 칭찬을 받다. 성균관 박사가 되다.
-선조 30년 1596년 병신(30세) : 성균관 전적이 되다. 가을에 병조, 공조좌랑을 거쳐 겨울에 형조좌랑이 되다.
-선조 31년 1597년 정유(31세) : 이른 봄, 휴가를 얻어 귀근하다가 5월에 분호조 참판 이광정의 종사관에 임명됨. 여름,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군량을 모집하다가 남원(南原) 함락되자 영광(靈光)으로 되돌아오다. 영광(靈光)에서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다. 염산 논잠포에서 9월 23일 왜적이 영광(靈光)으로 돌아오자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이순신장군 휘하로 드어가려고 떠나다가 영광 서북해안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다.
아들 용, 애생이와 조카 등 어린아이들 6명중 4명을 바다에 수장 당하고 1명의 조카아이를 왜의 땅에서 병으로 잃다.
-선조 32년 1598년 무술(32세) : 5월, 배를 빌려 탈출하던 도중 판도현(板島縣)을 지나다가 성문(城門)에 조선 침략을 비난하는 글을 써 붙이다. 3일 만에 좌도(佐渡)의 부하에게 붙잡혀 대진성(大津城)으로 되돌아오다. 왜승 호인(好人)에게서 일본의 방여(方輿), 직관(職官)을 묻고 좌도가(佐渡家)에 소장되어 있던 <왜국지도(倭國地圖)>를 베끼어 기록해두고, 아울러 적정(敵情)과 방략(方畧)을 적어 김석복(蔚山人, 金石福)에게 조정에 소를 올려주도록 부탁하다. 6월, 대판성(大阪城)으로 옮기다. 7월, 대판(大阪)에서 도요토미히데요시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새 도읍지인 복견성(伏見城)으로 옮기다.
-선조 33년 1599년 기해(33세) : 적중봉서를 중국(명나라)의 차관 왕건공(王建功)과 김석복, 신정남에게 초소(草疏)를 주어 본조(本朝)에 보내게 하다. 피노 중 강항 휘초 16종을 필사하여 왜승 후지와라 세이카 순수좌(등원성와)와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아까마쓰 히로미치에게 조선 주자학을 전수하다. 4서 5경을 포함해 16종 21책을 필사해 발문하다
-선조 34년 1600년 경자(34세) : 봄, 좌도(佐渡)에게 귀국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다. 왜승 경안(慶安)이 극력 권하여 허락을 받아 대마도 를 거쳐 거제도 장문포(장목) 5월 19일 귀국하게 된다. 선조의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로 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과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를 올리니 말 한 필을 하사받고 고향으로 내려오다. 건거록을 완성하다.
선조34 1601 신축 萬曆29 35 李德馨이 嶺南에 開府하여 倭의 사정을 묻자〈禮部絶倭書〉를 지어 올리다. 당시 등용을 조정에서 권했으나 스스로 罪人(죄인)이라 칭하고 9월 고향 영광(靈光)으로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고 후학양성에만 힘쓰다.
-선조 35년 1601년 신축(35세) : 좌의정 이덕형이 영남(嶺南)에 개부(開府)하여 왜(倭)의 사정을 묻자 예부절왜서(禮部絶倭書)를 지어 올리다. 가을에 운제마을로 거처를 옮겨 후학양성을 위해 운제서당을 열고 강학을 시작하다.
-선조 36년 1602년 임인(36세) : 대구향교 교수(敎授)에 서용되었으나 바로 사직하고 돌아오다.
-선조 37년 1603년 (37세) : 강감회요를 완성하다.17권 30책.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강항(姜沆) 엮음. 주희(朱熹)가 지은 강목(綱目)을 보완하여 엮은 책. 현종(顯宗) 8년(1667)에 그 아들 시만(時萬)이 간행하였다.
-선조 39년 1605년 (39세) : 불갑사중수문을 지음, 문선찬주 권선문 완성함.
-선조 40년 1606년 병인(40세) : 회답사 여우길回答使 呂祐吉이 일본에서 돌아와 倭人들이 공의 충의와 절개를 칭송한다며, 중국의 소무나 문천상 같다고 칭송한다며 東槎錄에 기록하여 아뢰었으나 북인(北人)들이 꺼리어 등용하지 않다.
<여우길의 보고서에 있음> 김천일장군 행장을 지음.
-선조 42년 1608년 무신(42세) : 순천교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않음. 선조가 승하하자 방상(方喪) 3년을 입고 동양 최대의 장편시 원가행(怨歌行)을 지어 조상하다.
-광해군 2년 1610년 경술(44세) : 팔송 윤황(尹煌)이 영광군수로 부임한 뒤 아들 윤순거(尹舜擧) 형제를 보내 수학(受學)하게하다. 광주향교 중건 상량문을 짓다.
-광해군 4년 1612년 임자(46세) : 절강총병이 조선의 경전지방에 왜인이 잡서(雜棲)한다 하여 지휘사 황분이 왔는데 이를 변무하다. 무안 화설당의 기문을 지음
-광해군 7년 1615년 경술(49세) : 부친 몽오공(夢梧公)극검 상을 당하여 형제들과 3년 시묘살이에 들어가다.
-광해군 10년 1618년 무오(52세) : 5월 6일, 병으로 졸하다. 11월, 불갑산(佛甲山)에 장사지내다. 일주일도 안 되어 이조이 부인 복띠로 자진하다.(영광군지 참조)
-인조 6년 1628년 무진 : 문인 동토 윤순거가 행장을 짓다. 함평이씨 이조이 부인 계유년 정려를 명받다.
- 1633 년 (인조 11) 함평이씨 명정
-인조 13년 1635년 을해 : 불갑 유봉에 사우를 짓다. 우암 송시열이 축문을 짓다.
-인조 14년 1636년 병자 : 유봉리 사우가 실화로 재가 되어 이에 판서 임담, 사성 김지수, 참봉 김우급 등이 발의하여 용산에 사우를 신축하여 용계사라 하고 액호를 우암 송시열 이 편액을 쓰다.
-효종 7년 1656년 병신 : 시남 유개가 간양록 서문을 짓다.
-효종 9년 1658년 무술 : (<수은집 >) 완성 (우암 송시열 서문 )통정대부 승정원 승지로 증직되다. 문인 윤순거(尹舜擧)가 문집(文集) 간양록(看羊錄)을 목판으로 간행하다.(宋時烈의 序)
-현종 8년 1667년 정미 : 선생의『강감회요』장판이 조성되다. 강감회요(綱鑑會要) 17권이 강행되다.(尹舜擧의 序) 강감회요의 장판이 판각해 조성되다. 청강 이제신은 조광조로 부터 성수침, 우계 성혼으로 이어지는 학맥으로 청강 이제신의 외손 정시수(鄭時遂)(1605-1685), 정시대(鄭時大) (1615-?) 형제가 영광 및 영암군수로 각각 부임하자 영광군수가 이를 간판(刊版), <강감회요 > 판각 (동토 윤순거가 서문을 쓰다.
-현종 9년 1668년 무신 : 경연 연석(筵席)에서 이단하(李端夏)의 요청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추증(追贈)하라고 명하다. 참의에 추증됨 .(<현종개수실록 > 권 19 현종 9 년 4 월 13 일 )
-숙종 8년 1682년 임술 : 동토 윤순거를 용계사에 추배함. 조정에서 수은선생 절의가 한나라 소무와 같다고 하여 “금소무(今蘇武)”로 정 시 시험문제를 삼아 인재를 뽑고 사손 익(翊)을 주관사정에 제수하다.
- 1702 년 (숙종 28) 용계사 중수 (군수 윤일복이 기문을 지음 ) 용계사 사액소를 올림 (權輔德 )
-숙종 35년 1709년 기축 : 용계사 사액을 청하자 권보덕이 제소(製疏)하다.
-영조 48년 1772년 임진 : 영조임금이 수은집을 예람하시고 선생의 절의를 한나라 소무, 송나라 문천상에 비하여 칭찬하고 7세손 재윤을 도사로 조용하다. 7세손 姜載潤 (姜載潤 )都事 (都事 )등용
-정조 22년 1798년 무오 : <간양록 >중 “산성이설지사 ”로 試題 삼음. 성담 송환기가 묘갈명을 짓다.
-고종 5년 1868년 무진 : 후손 강란수(姜蘭秀)가 문집을 활자로 중간 하다.(姜蘭秀, 姜日會의 跋)
-고종 19년 1882년 임오 : 6월 2일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을 증직하다. 대제학 김상헌이 시장을 찬하다. 시장 (諡狀 ) 지음 (대제학 김상현 )
-고종 37년 1900년 경자 : 광무4년 6월 10일 지중추원사 강항에 치제하다.
-일제강점기 1917년 정사 : 11대손 강대학(姜大學)이 수은집 속집(續集)을 간행하다.
-일제강점기 1940년대 : 수은문집과 『간양록』의 장판(藏板)은 수면래(水面來) 선생의 강당에 보관 중이었는데 왜정 말기에 왜인 영광경찰서장의 손에 의해 소각되고『간양록』도 왜인 경찰서장의 손에 몰수 당해 소각되어 분서(焚書)의 화를 당하였다.
-단기 4285년 1952년 : 현암 이을호 선생이 간양록 국역본 초판을 간행하다.
-단기 4291년, 1958년 강항의 기념관 ‘수은정(睡隱亭)’창건하다.
-단기 4313년, 1980년 : 간양록 국역 4판이 발행됨.
-단기 4316년, 1983년 癸亥(계해) 五月(오월)(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睡隱姜沆先生記念事業會(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 謹竪(근수) / 創立(창립)
초대회장 李乙浩(이을호) 國立光州博物館長(국립광주박물관장) 哲學博士(철학박사) 謹撰(근찬) 鄕土文化開發協議會長(향토문화개발협의회장) 鄭埰均(정채균) 謹書(근서)
이사 강대직(직손), 강종원(호남유림), 조남식(한학자), 김인곤(광주경상전문대학장), 이백순(한학자), 강대련(공무원), 전남도청 문화재위원 김희태(간사)가 주축이 됨.
-단기 4317년 1984년 : 간양록 국역 5판(養英閣출판사). 간양록(조선유자의 일본역류기 일역판, 박종홍 역주, 동양문고 평범사)
-단기 4321년 1988년 : 수은집 국역본이 간행됨. 전라남도(지사 송언종) 광주박물관(관장 이을호)
-단기 4334년 2001년 : 문화관광부에서 3월 이 달의 인물로 선정되다.
-선조 4년 1570년 경오(4세) : 백형 해(瀣)<저어당 : 이이 율곡선생 문인>이다.
-선조 5년 1571년 신미(5세) : 전라감사 신응시가 각(脚)자로 작문 운을 주자 <각도만리심교각(脚到萬里心敎脚)>이라고 응하자 탄복 하였다.
-선조 7년 1573년 계유(7세) : 맹자 1질을 한나절에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함에 책장수가 천재라 탄복하고 책을 그냥 주자 사양하니 정자의 나무에 걸어 놓고 떠나 맹자정이라 함. 현재 불갑면소재지에 맹자정기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 근처를 맹자마을이라 칭함.
-선조 8년 1574년 갑술(8세) : 중국고서 통감감목을 하룻밤 새에 통달하여 고창군 아산면 칠암(칠암마을)고을에 강목촌(강목마을)이 생겨나고 현재 전해내려오고 있음.
-선조 9년 1575년 을해(9세) :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를 지었다.
(어릴 때 습성을 익혀두면 천성과 같이 된다는 내용)
-선조 10년 1576년(10세) :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예와 경학을 터득함.
-선조 14년 1580년 경진(14세) : 모친 김씨 상을 당하여 禮(예)를 갖춰 정성을 다하다.
-선조 15년 1581년 임오(15세) : 母親喪(모친상)을 마치고 책문(策文)으로 향시(鄕試)에 합격하다.
-선조 15년 1583년(17세) : 향시에 합격(초시)
-선조 21년 1587년 정해(21세) : 진사시 삼장(三場)에 모두 합격하다.
-선조 22년 1588년 무자(22세) :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다. 관례를 하고 참봉(參奉) 김봉(金琫)의 딸 전주김씨와 혼인하다.
-선조 25년 1591년 신묘(25세) : 백형 저어당이 신묘사화로 화를 당하다.
-선조 26년 1592년 임진(26세)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띄워 군량과 군기를 모아 의병장 제봉 고경명에게 보내다. 영광 임진 수성활동에 장문서로 참여하고 의병활동하다.
-선조 27년 1593년 계사(27세) : 광해군이 진주의 분조(分朝)에서 시행한 정시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하다.<김신국, 김홍우, 이진선 등 9 명이 뽑히다. 소금과 절인고기 등 어염을 유통하고 백미 100석을 모아 사촌동생 만은공 강낙으로 하여금 고경명, 김천일, 최경장 의병소에 보내주다.
-선조 28년 1594년 갑오(28세) : 성혼(成渾)의 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교서관(校書館)에 분관되다. 우계선생의 문호가 쓸쓸하니 멀리 찾아가 뵈다. 겨울, 기주관(記注官)으로 경연에 입시하다.
-선조 29년 1595년 을미(29세) : 문한(文翰)을 잘 처리하여 선조의 칭찬을 받다. 성균관 박사가 되다.
-선조 30년 1596년 병신(30세) : 성균관 전적이 되다. 가을에 병조, 공조좌랑을 거쳐 겨울에 형조좌랑이 되다.
-선조 31년 1597년 정유(31세) : 이른 봄, 휴가를 얻어 귀근하다가 5월에 분호조 참판 이광정의 종사관에 임명됨. 여름,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군량을 모집하다가 남원(南原) 함락되자 영광(靈光)으로 되돌아오다. 영광(靈光)에서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다. 염산 논잠포에서 9월 23일 왜적이 영광(靈光)으로 돌아오자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이순신장군 휘하로 드어가려고 떠나다가 영광 서북해안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다.
아들 용, 애생이와 조카 등 어린아이들 6명중 4명을 바다에 수장 당하고 1명의 조카아이를 왜의 땅에서 병으로 잃다.
-선조 32년 1598년 무술(32세) : 5월, 배를 빌려 탈출하던 도중 판도현(板島縣)을 지나다가 성문(城門)에 조선 침략을 비난하는 글을 써 붙이다. 3일 만에 좌도(佐渡)의 부하에게 붙잡혀 대진성(大津城)으로 되돌아오다. 왜승 호인(好人)에게서 일본의 방여(方輿), 직관(職官)을 묻고 좌도가(佐渡家)에 소장되어 있던 <왜국지도(倭國地圖)>를 베끼어 기록해두고, 아울러 적정(敵情)과 방략(方畧)을 적어 김석복(蔚山人, 金石福)에게 조정에 소를 올려주도록 부탁하다. 6월, 대판성(大阪城)으로 옮기다. 7월, 대판(大阪)에서 도요토미히데요시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새 도읍지인 복견성(伏見城)으로 옮기다.
-선조 33년 1599년 기해(33세) : 적중봉서를 중국(명나라)의 차관 왕건공(王建功)과 김석복, 신정남에게 초소(草疏)를 주어 본조(本朝)에 보내게 하다. 피노 중 강항 휘초 16종을 필사하여 왜승 후지와라 세이카 순수좌(등원성와)와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아까마쓰 히로미치에게 조선 주자학을 전수하다. 4서 5경을 포함해 16종 21책을 필사해 발문하다
-선조 34년 1600년 경자(34세) : 봄, 좌도(佐渡)에게 귀국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다. 왜승 경안(慶安)이 극력 권하여 허락을 받아 대마도 를 거쳐 거제도 장문포(장목) 5월 19일 귀국하게 된다. 선조의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로 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과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를 올리니 말 한 필을 하사받고 고향으로 내려오다. 건거록을 완성하다.
선조34 1601 신축 萬曆29 35 李德馨이 嶺南에 開府하여 倭의 사정을 묻자〈禮部絶倭書〉를 지어 올리다. 당시 등용을 조정에서 권했으나 스스로 罪人(죄인)이라 칭하고 9월 고향 영광(靈光)으로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고 후학양성에만 힘쓰다.
-선조 35년 1601년 신축(35세) : 좌의정 이덕형이 영남(嶺南)에 개부(開府)하여 왜(倭)의 사정을 묻자 예부절왜서(禮部絶倭書)를 지어 올리다. 가을에 운제마을로 거처를 옮겨 후학양성을 위해 운제서당을 열고 강학을 시작하다.
-선조 36년 1602년 임인(36세) : 대구향교 교수(敎授)에 서용되었으나 바로 사직하고 돌아오다.
-선조 37년 1603년 (37세) : 강감회요를 완성하다.17권 30책.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강항(姜沆) 엮음. 주희(朱熹)가 지은 강목(綱目)을 보완하여 엮은 책. 현종(顯宗) 8년(1667)에 그 아들 시만(時萬)이 간행하였다.
-선조 39년 1605년 (39세) : 불갑사중수문을 지음, 문선찬주 권선문 완성함.
-선조 40년 1606년 병인(40세) : 회답사 여우길回答使 呂祐吉이 일본에서 돌아와 倭人들이 공의 충의와 절개를 칭송한다며, 중국의 소무나 문천상 같다고 칭송한다며 東槎錄에 기록하여 아뢰었으나 북인(北人)들이 꺼리어 등용하지 않다.
<여우길의 보고서에 있음> 김천일장군 행장을 지음.
-선조 42년 1608년 무신(42세) : 순천교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않음. 선조가 승하하자 방상(方喪) 3년을 입고 동양 최대의 장편시 원가행(怨歌行)을 지어 조상하다.
-광해군 2년 1610년 경술(44세) : 팔송 윤황(尹煌)이 영광군수로 부임한 뒤 아들 윤순거(尹舜擧) 형제를 보내 수학(受學)하게하다. 광주향교 중건 상량문을 짓다.
-광해군 4년 1612년 임자(46세) : 절강총병이 조선의 경전지방에 왜인이 잡서(雜棲)한다 하여 지휘사 황분이 왔는데 이를 변무하다. 무안 화설당의 기문을 지음
-광해군 7년 1615년 경술(49세) : 부친 몽오공(夢梧公)극검 상을 당하여 형제들과 3년 시묘살이에 들어가다.
-광해군 10년 1618년 무오(52세) : 5월 6일, 병으로 졸하다. 11월, 불갑산(佛甲山)에 장사지내다. 일주일도 안 되어 이조이 부인 복띠로 자진하다.(영광군지 참조)
-인조 6년 1628년 무진 : 문인 동토 윤순거가 행장을 짓다. 함평이씨 이조이 부인 계유년 정려를 명받다.
- 1633 년 (인조 11) 함평이씨 명정
-인조 13년 1635년 을해 : 불갑 유봉에 사우를 짓다. 우암 송시열이 축문을 짓다.
-인조 14년 1636년 병자 : 유봉리 사우가 실화로 재가 되어 이에 판서 임담, 사성 김지수, 참봉 김우급 등이 발의하여 용산에 사우를 신축하여 용계사라 하고 액호를 우암 송시열 이 편액을 쓰다.
-효종 7년 1656년 병신 : 시남 유개가 간양록 서문을 짓다.
-효종 9년 1658년 무술 : (<수은집 >) 완성 (우암 송시열 서문 )통정대부 승정원 승지로 증직되다. 문인 윤순거(尹舜擧)가 문집(文集) 간양록(看羊錄)을 목판으로 간행하다.(宋時烈의 序)
-현종 8년 1667년 정미 : 선생의『강감회요』장판이 조성되다. 강감회요(綱鑑會要) 17권이 강행되다.(尹舜擧의 序) 강감회요의 장판이 판각해 조성되다. 청강 이제신은 조광조로 부터 성수침, 우계 성혼으로 이어지는 학맥으로 청강 이제신의 외손 정시수(鄭時遂)(1605-1685), 정시대(鄭時大) (1615-?) 형제가 영광 및 영암군수로 각각 부임하자 영광군수가 이를 간판(刊版), <강감회요 > 판각 (동토 윤순거가 서문을 쓰다.
-현종 9년 1668년 무신 : 경연 연석(筵席)에서 이단하(李端夏)의 요청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추증(追贈)하라고 명하다. 참의에 추증됨 .(<현종개수실록 > 권 19 현종 9 년 4 월 13 일 )
-숙종 8년 1682년 임술 : 동토 윤순거를 용계사에 추배함. 조정에서 수은선생 절의가 한나라 소무와 같다고 하여 “금소무(今蘇武)”로 정 시 시험문제를 삼아 인재를 뽑고 사손 익(翊)을 주관사정에 제수하다.
- 1702 년 (숙종 28) 용계사 중수 (군수 윤일복이 기문을 지음 ) 용계사 사액소를 올림 (權輔德 )
-숙종 35년 1709년 기축 : 용계사 사액을 청하자 권보덕이 제소(製疏)하다.
-영조 48년 1772년 임진 : 영조임금이 수은집을 예람하시고 선생의 절의를 한나라 소무, 송나라 문천상에 비하여 칭찬하고 7세손 재윤을 도사로 조용하다. 7세손 姜載潤 (姜載潤 )都事 (都事 )등용
-정조 22년 1798년 무오 : <간양록 >중 “산성이설지사 ”로 試題 삼음. 성담 송환기가 묘갈명을 짓다.
-고종 5년 1868년 무진 : 후손 강란수(姜蘭秀)가 문집을 활자로 중간 하다.(姜蘭秀, 姜日會의 跋)
-고종 19년 1882년 임오 : 6월 2일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을 증직하다. 대제학 김상헌이 시장을 찬하다. 시장 (諡狀 ) 지음 (대제학 김상현 )
-고종 37년 1900년 경자 : 광무4년 6월 10일 지중추원사 강항에 치제하다.
-일제강점기 1917년 정사 : 11대손 강대학(姜大學)이 수은집 속집(續集)을 간행하다.
-일제강점기 1940년대 : 수은문집과 『간양록』의 장판(藏板)은 수면래(水面來) 선생의 강당에 보관 중이었는데 왜정 말기에 왜인 영광경찰서장의 손에 의해 소각되고『간양록』도 왜인 경찰서장의 손에 몰수 당해 소각되어 분서(焚書)의 화를 당하였다.
-단기 4285년 1952년 : 현암 이을호 선생이 간양록 국역본 초판을 간행하다.
-단기 4291년, 1958년 강항의 기념관 ‘수은정(睡隱亭)’창건하다.
-단기 4313년, 1980년 : 간양록 국역 4판이 발행됨.
-단기 4316년, 1983년 癸亥(계해) 五月(오월)(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睡隱姜沆先生記念事業會(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 謹竪(근수) / 創立(창립)
초대회장 李乙浩(이을호) 國立光州博物館長(국립광주박물관장) 哲學博士(철학박사) 謹撰(근찬) 鄕土文化開發協議會長(향토문화개발협의회장) 鄭埰均(정채균) 謹書(근서)
이사 강대직(직손), 강종원(호남유림), 조남식(한학자), 김인곤(광주경상전문대학장), 이백순(한학자), 강대련(공무원), 전남도청 문화재위원 김희태(간사)가 주축이 됨.
-단기 4317년 1984년 : 간양록 국역 5판(養英閣출판사). 간양록(조선유자의 일본역류기 일역판, 박종홍 역주, 동양문고 평범사)
-단기 4321년 1988년 : 수은집 국역본이 간행됨. 전라남도(지사 송언종) 광주박물관(관장 이을호)
-단기 4334년 2001년 : 문화관광부에서 3월 이 달의 인물로 선정되다.
- 다음글대한민국 K선비한복모델 선발대회 홈페이지 오픈 안내 23.03.15